알랭 드 보통_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끄적임
사람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미가 있을 수 있나? 모두가 조각상을 보며 완벽한 미를 가졌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조각상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어째서? 사랑은 절대적인 미를 가진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판단력 비판. 결정 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론. 착시 효과처럼. 스탕달.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 사람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사랑인 걸까. 완벽함에서 오는 싫증? 이거는 동의 못하겠는데. 모든 것에는 싫증이 날 수밖에 없지 않나.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추를 희롱한다. "비율의 수학적 규칙에 편안하게 안주하지 않고 모험에 나서서, 추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바로 그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라. 토끼를 찾으면 토끼가 보이고 오리를 찾으면 오리가 보이는 토끼오리그림처럼, 사랑도 결국 발견하는 것이다. (마치 행복과 비슷한 걸? 절대적인 상황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감정이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결국 사랑도 주관에 근거한 것인 듯하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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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행복은 어떤 관계일까, 적어도 영적인 성숙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결을 같이 하는 것 같다. 나는 행복의 주관론을 강하게 지지하는 편이기에, 사랑도 주관론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렇기에 꼭 얼굴이 완벽해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완벽한 얼굴은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완벽한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이런 사랑만 추구했다가는 평생 사랑 한 번 못해보고 죽을 거야. 내 분수에 맞는 사람 중에 제일 괜찮은 사람을 골라야지". 이런 (유전자의 생존 전략 관점같은) 생각이 든다면, 사랑의 주관론은 결국 사랑의 실패에 대한 도피처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과연 이 생각은 사랑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맞을까? 완벽한 사람을 상정하는 순간, 사랑은 비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가보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은가? 하는 평가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를 통해 사랑은 영적이고 조용한, 조심스럽고 소중히 다뤄져야 하는 영역에서 속세의 영역으로 내려오게 된다. 영적인 공간에서 사랑을 빼고 말고는 본인의 선택이고 자유이긴 하지만, 영적이 공간에서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을 사랑을 제외한다는 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특권을 하나 내려놓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사랑까지 속세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접근은 사랑을 사랑으로 남겨두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해서 사랑이란 결국 주관적이고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결론? 사랑은 주관적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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